기도의 사도직 영성
Living in Prayer / 일상과 신앙을 통합하는 평신도 영성
- 기도의 사도직, 기원과 영성
-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찾음
- 예수성심과의 인격적 만남
- 일상에서의 보편 사제직
- 하루의 일상을 봉헌함
- 일상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살아감
- 사도들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 양심성찰
- 매월 교황님 기도지향
- 기도의 사도직 영성 정리
- 이냐시오 영성과 기도의 사도직
- 기도의 사도직 전대사
그림 평범한 일상과 함께 하시는 나자렛 예수님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찾음
Finding God in our ordinary life
기도의 사도직 영성은 기본적으로 그 기원에서 찾을 수 있다. 1844년 인도 선교가 예정되었던 신학생들이 지금 해야 할 학업보다 인도에 관한 탐구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고트를레 신부는 지금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도가, 기도의 사도가 되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예수성심의 사랑과 일치하여 그날 하루 일상의 모든 것을 그분께 봉헌함으로써,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가, 즉 오늘 하루 나의 일상이 주님으로부터 파견받은 나의 선교지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이전 30년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일상의 삶을 사셨다. 복음사가조차 특별히 쓸 말이 없을 정도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일상을 사셨던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는 성년이 되신 20대에도 집안일이나 하고 목수일을 하시며 지내셨을까? 그 시간에 병자를 한 명이라도 더 고쳐주시고 복음을 전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을 따랐을 텐데…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30년간 일상의 삶을 사시면서 우리에게 평범한 일상의 소중한 가치를 직접 보여주신 것이며, 우리가 어떻게 일상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셨다. 그리하여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하느님께 큰 영광이며 참된 하느님의 뜻은 우리 일상의 삶 안에서 실현되는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에 기도의 사도직 회원들은 평범한 일상의 삶을 예수성심께 봉헌하고, 평범한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찾는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한 가치를 찾고 일상의 삶을 성체성사와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사도로 살아감으로써 평신도들은 기도와 활동을 통합하게 된다. 이로써 내 삶의 현장은 곧 기도의 장(場)이 되며, 이것이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찾는(Finding God in our ordinary life)' 영성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성스러움은 어떤 특별한 것을 행함이 아니라, 위대한 사랑을 가지고 일상의 평범한 일을 하면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기도의 사도직 회원이었던 소화 데레사 성녀가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던 것이 바로 기도의 사도직의 영성이다. 그것은 오늘 내게 주어지는 모든 것, 평범하고 소소한 일들조차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소명이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 내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 교회의 일원으로서 평신도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기도의 사도직에서는 공의회 이전 이미 평범한 일상에서 세례성사의 삶을 살아가는 평신도의 보편 사제직을 강조하였다. 이제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찾고, 각자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로 살아가는 평신도들만의 고유한 소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일상의 일을 사랑을 가지고 행하여야 할 것이며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얼마나 유용한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은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질서를 만드셨다. 하느님의 권능 없이는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이 지금 이렇듯 자리를 잡고 있을 수 없다. 태양, 산, 바다, 인간, 동물과 식물, 창조된 모든 것들이 바로 하느님의 현존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항상 일하고 계시다.(사도행전 17,27-28) 하느님은 결코 세상을 창조하시고 저너머로 떠나신 분이 아니다. 모든 것은 무(無)에서 창조되었기에, 피조물 자체가 하느님의 현존이며,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현존이다. 창조가 곧 하느님의 현존이기 때문이다.(사도행전 17,24-27) 그래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온 세상에 가득한 하느님의 현존을 찬미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집에 와 있다. 그분의 현존 안에 살아가고 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세상 저 너머에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있는 세상에 육화하시어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안에 현존하시는 분이다. 그분이 바로 임마누엘 하느님이시다.(마태오 1,23)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찾아야 하며, 우리 역시 세상 안으로 육화하여야 한다. 그것은 곧 오늘 내게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육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성이나 신학적 지식이 단지 머리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의 삶 안에 육화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을 것이다.(마태오 7,26) 반드시 내 일상에 복음이 의미로 다가와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육화하신 그리스도의 삶이 되는 것이다. 육화는 그리스도의 영성이며, 하느님의 영성이다.
육화는 또한 겸손의 영성이다. 삼위일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셨지만 스스로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자신을 스스로 낮추시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필리피 2,6-8) 그분 스스로 겸손의 길을 가셨기에 그 어떤 경우든 겸손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영성이 아니다. 복음서는 기본적으로 육화의 영성인 겸손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많은 이들이 복음서의 말씀은 좋은데 실천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당연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겸손한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다. 자신을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질 이유도, 낮아질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겸손은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겸손한 사람만이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
세상은 상대방을 낮추고 자신을 높이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낮추며 기쁨을 찾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낮추면 하느님께서 높여주시기 때문이다.(필리피 2,5-9) 겸손은 하늘나라의 열쇠이다. 가나안 여인이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오 15,21-28)라고 말씀드릴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바꾸셨듯이, 겸손은 삼위일체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겸손한 사람만이 평범한 일상의 소중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 영성강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영성' 및 '그리스도교 영성의 문, 겸손(엑스트라의 영성)' 참조
예수성심과의 인격적 만남
기도는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다 / Encounter, not Performance
우리가 이렇듯 겸손하게 평범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수성심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며, 예수님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만남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을 인간으로 만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신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그분을 한 사람으로 만나 그분과 인간적인 감정의 교류를 하여야 한다.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 형성을 위해서는, 마치 우리가 한 사람과 식사도 하고 함께 거리를 거닐며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처럼,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기도이며, 이냐시오 영신수련 복음 관상에 따른 묵상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위한 효율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만남을 통해 ‘사랑받는 체험’이 필요하며, 그분 사랑으로 가슴 뜨거워지는 예수성심의 체험이 필요하다.
그분 사랑 안에 머물 때, 우리는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내 안에 머물러라. 그러면 너희는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열매는 저절로 맺힐 것이다.(요한 15,4-5) 그래서 우리는 열매를 청하지 말고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기를 청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이다.
“주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한 사람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사랑을 체험하고 함께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성심과의 만남이다.
※ 관련 글: 8. '예수성심 신심' 또는 영성강좌 '사랑과 고독의 시원, 예수성심(사랑을 찾는 고독의 여정)' 참조
일상에서의 보편 사제직
평신도들은 일상의 삶과 현장이 바로 하느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제대이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며 그분의 사제직으로 초대된 사람들이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로 2,9)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1베드로 2,5)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서 12,1)
사제는, 사전적 의미로, "인간의 고뇌와 고통을 신에게 전하고 사람들을 대신해 예배와 제사를 드리며 찬미와 감사, 청원과 속죄의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시어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킨 대사제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된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고(콜로새 1,15-20 1코린토 12,12-31), 그분의 사제직에 동참하게 된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모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완성된 구원에 참여하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신비체의 지체가 되어 그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 것이다.(가톨릭 대사전 참조)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의 화해를 위해 우리 자신과 일상의 삶을 예수성심께 봉헌하며 그리스도의 삶, 특별히 우리의 희생과 상처를 통해 그분 수난에 동참하고, 고통과 상처의 승화를 통해 부활을 체험함으로써 그분의 사제직에 동참한다. 그것은 자신의 희생제물을 예수님의 삶과 함께 봉헌하는 제사이며, 내게 주어지는 일상의 십자가를 통해, 일상의 평범하고 소소한 일들을 통해, 일상의 기쁨과 좌절을 통해, 널리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평신도의 보편 사제직이며 성체성사적 삶이다. 따라서 사제가 성당의 제대 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듯, 일반 평신도들은 일상의 삶과 현장이 바로 하느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평신도들만의 제대가 되는 것이다.
특별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직무 사제직과 함께 평신도의 보편 사제직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사명에 밀접히 결합시키신 평신도들에게 당신 사제직의 일부도 맡기시어, 하느님의 영광과 인류 구원을 위하여 영신적인 예배를 드리게 하셨다. 그러한 까닭에 평신도들은 그리스도께 봉헌되고 성령으로 도유된 사람들로서 놀랍게도 언제나 그들 안에서 성령의 더욱 풍부한 열매를 맺도록 부름을 받고 또 가르침을 받는다. 그들의 모든 일, 기도, 사도직 활동, 부부생활, 가정생활, 일상의 노동, 심신의 휴식은, 성령 안에서 그 모든 일을 하고 더욱이 삶의 괴로움을 꿋꿋이 견뎌 낸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인 제물이 되고, 성찬례 거행 때에 주님의 몸과 함께 정성되이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된다. 또한 이와 같이 평신도들은 어디에서나 거룩하게 살아가는 경배자로서 바로 이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한다.”(「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 인류의 빛」 34항)
일상의 삶을 봉헌함
아침 봉헌기도를 통해 우리는 그날 자신의 하루를 축성하며, 기쁨과 고통 그리고 소소한 일까지 하루 일상의 삶을 기도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기도의 사도직’ 핵심은 매일 아침에 드리는 봉헌기도에 있다. 이 짧은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루 일상의 삶을 예수성심께 봉헌하며, 세례성사를 통해 받은 ‘왕의 사제직’(1베드로 2,9)으로의 부르심을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응답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루 일상의 삶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것"(로마서 12,1)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말씀하셨듯이, 매일 아침에 봉헌기도를 드리는 것은 "신자들 각자나 모든 이들의 삶에 있어 근원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어야 한다."
매일 드리는 아침 봉헌기도는 그날 하루 모든 기도와 일 그리고 기쁨과 고통을 예수성심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어떤 기도든 바칠 수 있으며, 한국 기도의 사도직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봉헌 기도문을7) 드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하루 일상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 특별히 그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과 일치하려는 열망을 가진 마음이다. 우리는 아침 봉헌기도를 통해, 오늘 하루 일상의 삶이 신앙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고 신앙의 표현이 되도록 기도드린다. 그리하여 아침 봉헌기도와 조화를 이루는 한 우리가 하루 중 행하는 모든 것들은 기도로 승화되는 것이다.
하루를 봉헌한다는 것은 그날 하루 나의 삶을 주님의 뜻에 맡기며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때론 내 뜻과는 다르게 일이 전개될 수 있지만, 그저 오늘 내게 주어지는 상황과 일을 불평 없이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봉헌에는 타인을 위한 희생과 같은 사랑의 실천이나 인내와 극기가 있을 수 있고 나의 성공과 기쁨을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내어드릴 수도 있으며,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실패와 좌절, 상처와 어둠과 같은 일상의 십자가를 봉헌할 수도 있다. 이러한 희생과 아픔은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과 하나 되어 세상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하느님께 봉헌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경우든 사랑의 마음을 그분께 봉헌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대단한 희생이나 어려운 사랑의 실천도 물론 큰 봉헌이다. 하지만 일상의 소소한 것들, 때론 너무 소소해서 가치 없이 느껴지는 것들을 주님께 봉헌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연 그런 것들이 하느님께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그것을 거룩히 하는 것은 봉헌물 자체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성령이시다.8) “아버지께 봉헌하는 이 예물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어…”(감사기도 제3양식) 사실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느님께 우리가 드릴 것이 뭐가 있겠는가! 구약성경에서 가난한 이들이 바치는 비둘기 두 마리의 타오르는 연기가 과연 하느님께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레위기 5,7 참조) 우리의 보잘것없는 제물을 거룩히 변모시키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것은 마치 한낱 물질에 불과한 빵과 포도주가 거룩한 성체와 성혈로 변화되듯, 우리의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의 사건과 일을 거룩한 희생제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축성하는 보편 사제직을 행하게 된다.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물은 모두 하찮은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는 어떤 봉헌물을 얼마나 드리느냐가 아니라 어떤 지향과 의지, 사랑을 드렸는가가 중요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일상의 소소한 모든 것들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다. 그분께서 우리의 보잘것없는 봉헌물을 거룩히 하실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희생을 해도 성령께서 축성하지 않으면 카인의 제물처럼 하느님께서는 굽어보지 않으실 것이다.(창세기 4,5) 소화 데레사 성녀는 바로 이렇듯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봉헌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따라서 기도의 사도직 회원들은 매일 아침 봉헌기도를 드리며, 성령께서 오늘 하루 나의 일상에 거룩하신 성령의 불을 지피시어 나의 평범한 하루의 일상이 거룩한 희생 제물로 성화 되기를 청하는 것이다. 이로써, 아침 봉헌기도를 통해 우리는 그날 자신의 하루를 축성하며, 비록 매 순간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기쁨과 고통 그리고 소소한 일까지 하루 일상의 삶을 기도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7) 10. “회원 가입 및 의무” 3) '기도와 함께하는 일상의 삶' 참조
8) Albert Vanhoye S.J., 《그리스도인의 보편 사제직 - 우리 모두를 사제로 삼으셨으니》 기도의 사도직 세미나 발표문, 최현순 譯, 바오로딸, 2018, 40쪽 참조.
일상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살아감
기도의 사도직 회원들은 세상 성화를 위해 각자 일상으로 파견된 예수성심의 사도들이다.
우리는 세상에 파견된 그리스도의 사도들이다. 사도는 그 말씀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명을 지금 이곳에서 이어가는 그분의 벗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도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의 일상으로 파견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세상의 일상으로 파견하여 그분의 사명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예수님께서 지상의 삶을 마무리 하시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성부께 받은 사명을 지상에 남은 우리들이 이어가며 그분의 삶을 일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안에는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며,(갈라티아 2,20)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이다.(콜로새 1,24) 도대체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닌가? 파스카의 신비로 모든 것을 이루신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바로 인간들의 협조이다.”(James Kubicki, S.J.)
이냐시오 영성은 홀로 깨달음을 얻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세상으로 파견되는 사도적 영성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가는 제자의 모습이 필요하며, 그분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 형성이 필요하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럴 때, 예수님이라면 어찌하셨을까?”를 생각하며 그분을 닮고자 했고, “이 일이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루는데 합당한 것인가?”를 식별하는 삶을 살았다. 일상의 모든 행동에서 그분의 삶을 닮고 그분의 사명을 식별하며 행동하였던 것이다. 그분의 사명은 무엇일까? 나는 그분의 사명을 위해 지금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교회의 사명이다. 하늘나라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적 개념이기에, 지금 내가 여기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한다면 바로 내 안에, 바로 이곳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는 것이며,(마태오 12,28) 그것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은”(마태오 9,37) 이 시대에 하느님 나라의 일꾼으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간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1요한 4,16ㄴ) 하느님의 사랑이 머무는 곳은 그 어디든 하느님의 나라이기에,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내 일상에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지향이다.
그분의 연민 어린 마음은 세상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우리의 영혼 구원을 위해 스스로를 속죄의 제물로 바치셨다. 따라서 회원들은 예수님의 사명과 자신의 삶이 일치할 수 있도록 사도적 준비성을 갖추고, 우리의 봉헌과 사랑 그리고 희생을 통해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 그것은 우리의 성체성사적 삶을 그분께 제물로 봉헌하는 것이며, 그분의 사도로서 내 일상에서 성부께서 성자께 부여하신 사명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체성사적 삶은 파스카의 삶이요, 그것은 타인을 위한, 세상을 위한 삶이다.(man for others, man for the world)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people of God)으로 정의하였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인 내 이웃 형제들을 위한 모든 나의 희생과 봉사가 곧 교회를 위한 봉사이며,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우리의 일상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루는 구체적인 장소이며,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모든 일들은 나의 소명이다. 특별히, 기도의 사도직 회원들은 세상 성화를 위해 각자 일상으로 파견된 예수성심의 사도들이다.
사도들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기도의 사도직 회원들은 사도들의 어머니이신 성모성심과 일치하여 살아간다.
기도의 사도직 회원들은 사도들의 어머니이신 성모신심과 일치하여 살아간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 성모님께서는 예수님 수난 이후 제자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성모님은 당신 아들을 세상에 탄생시키신 것처럼, 사도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상에 탄생시킨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또한 사도들의 어머니이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아들이 떠난 세상에서 제자들이 당신 아들의 사명을 계속할 때 그들의 어머니가 되셨던 것이다. 이같이 교회의 여정에 어머니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처럼, 기도의 사도직 여정에 그분을 어머니로 모시고 섬기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예수성심이 성모님의 태중에서 잉태되셨듯이 성모성심은 예수성심을 품고 계시다. 우리는 성모성심이 깊어질수록 성모성심께서 품고 계신 예수성심을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이다. 성모성심은 예수성심께로 가는 문이며, 어머니께서는 우리를 당신 아드님의 성심으로 인도하여 주시는 분이다. 따라서 성모님은 예수님의 내면적이고 친밀한 인격적 만남을 위한 여정, 바로 Way of the Heart, 마음의 길이시다.
양심성찰
하루의 끝에 양심성찰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아침에 드렸던 봉헌을 통해 오늘 하루 하느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인식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매일 아침에 드리는 봉헌기도와 저녁 양심성찰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하루의 끝에 양심성찰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아침에 드렸던 봉헌을 통해 오늘 하루 하느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인식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따라서 회원들은 매일 하루를 마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다가가 15분 정도 주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을 갖는다.
양심성찰은 어떻게 하는가?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특히 잠들기 전 우리는 아무런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하루 중 몇몇 사건들을 생생하게 돌아보는 경향이 있다. 특별히 그날 중대한 사건이 있었다면, 우리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그 일을 되새기곤 한다. 예를 들어 그날 있었던 친구와의 말다툼을 마음속으로 재현하면서 "그때 이런 말을 했어야 했는데…", 또는 "왜 그 친구는 그런 행동을 했을까?" 등 여러 가지 생각들을 떠올릴 것이다. ‘양심성찰’이란 바로 이러한 우리들의 자연적인 성향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루를 뒤돌아보며 갖게 되는 성찰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그분의 활동을 좀 더 구체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며, 우리가 언제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했으며 또 언제 거절하였는가에 좀 더 마음을 기울이게 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지난 시간 위에 무작정 떠돌아다니게 한다. 이때 어떤 판단이나 분석도 하지 않고, 그저 지난 시간에 우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던 일들을 찾아 감사하는 마음으로 잠시 그 순간에 머문다. 우리가 마음을 집중하여 지난 시간을 뒤돌아본다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웠던 하루라도 분명 자그마한 기쁨과 감사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훈련을 통해 보통은 쉽게 잊고 지나칠 하루 중의 많고 다양한 기쁨과 감사의 순간들을 찾고 놀라곤 한다. 아마도 이러한 것들은 너무나 특별하지 않고 작고 보잘것없으며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기에 어떤 고통스럽고 강렬한 다른 경험에 쉽게 가리어 눈에 띄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우린 성찰을 통해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순간이었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후, 우리 안에 있었던 여러 감정들과 느낌들을 회상하고, 할 수 있다면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이끌었는가 살펴본다. 우리는 이러한 감정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보면서 표면적인 감정들 아래에 있는 우리의 내적 태도를 볼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경험을 분석하거나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그저 감정들을 관상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언제 우리가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었으며 또 언제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을 거절했는가를 주님께서 보여주시도록 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냈던 순간을 만나게 되면 감사를 드리고, 예수님을 거절했던 순간을 만나면 주님께 용서를 청한다. 주님은 결코 우리들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보다 우리의 결점을 더 잘 알고 계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분께 보여 드리는 것이며, 그분은 우리들의 그러한 어둠을 선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그런 후, 우리는 다가올 하루를 생각하며 주님의 도움을 청하는 짧은 기도로 끝을 맺는다.9)
아래와 같은 형식은 성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1. 감사: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2. 조명: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에서 하느님과 이웃과 나를 거짓 없이 볼 수 있도록 하느님의 빛으로 비추어 주시기를 청한다.
3. 성찰: 나의 삶에서 내가 무엇을 한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하셨으며 나는 어떻게 응답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핀다.
4. 자비: 하느님께서 나의 삶에 필요한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한다.
5. 변화: 내가 해왔던 방식을 하느님의 방식으로 바꾸라는 초대에 귀를 기울이며 변화를 위한 결심을 한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나의 삶에 오시기를 청하며 주님의 기도를 드린다.
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내 삶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의식하며 나의 내적 움직임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은 오늘 하루 나를 어떻게 인도하셨으며, 나는 어떻게 응답해 드렸는가? 오늘 있었던 일과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그리하여 하루를 '나'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옮기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오늘 주님은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나는 오늘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주님의 사랑은 지금 어떻게 나와 함께 하고 있는가?
나는 주님께 어떻게 내 사랑을 드릴 것인가?
예수님께서 당신 마음으로 느끼셨던 감정(연민, 상처, 고통, 기쁨, 슬픔)을 오늘 하루 언제 내 마음으로 느끼며 그분과 함께하였는가?
오늘 하루 나는 주님께 무엇을 감사드리는가?
오늘 하루 그분을 마음 아프게 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오늘 하느님께 무엇을 봉헌하였는가?
나는 오늘 어떻게 그분께 위로와 기쁨을 드렸나?
나는 오늘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을 다하였는가?
나는 오늘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였는가?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드린 나의 봉헌으로 하느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가?
오늘 하루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늘 하루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느님께도 중요한 것이었을까?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단절되어 계신 분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현존과 사랑을 우리들에게 드러내고 계시는 분이다. 따라서 우리 삶의 현장은 결코 하느님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하느님께서 우리와 대화를 나누시는 場(장)이다. 우리가 일상의 삶을 신앙의 눈으로 성찰하고 바라본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들 각자에게 어떻게 드러내시었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끊임없이 부르시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즉 우리가 구체적으로 만났던 사람들과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을 우리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으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었는지 성찰하여 보자.
성령께서 항상 일하시듯이 악한 영도 항상 일하고 있기에,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영의 활동을 식별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10)(영성강좌 ‘일상에서의 영적 위로와 실망’ 참조)
기도의 사도직에서는 성찰을 통해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발견하고 이를 성사적 은총으로 치유받기 위해 주기적으로 화해성사를 가질 것을 권장한다.
9) The Irish Jesuits, 「Sacred Space」
10) 《영신수련》 정제천 譯, 이냐시오 영성연구소, 2005, 135-143쪽
매월 교황님 기도지향
기도의 사도직 회원들은 교회의 사명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다.
1890년 레오 13세 때부터 교황의 관심사가 담긴 매월 기도지향을 기도의 사도직에 위임하며,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함께 기도하도록 권고하였다. 인류와 교회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과 특별히 선교 지역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신자들의 시야는 전 인류의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신자들은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강화하고, 그들 자신이 예수님의 사명에 협력하도록 그분에 의해 선택된 사도임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들의 단순한 일상의 삶이 교회의 사명을 지속하는 데 얼마나 유용한지 깨닫게 되었다. 이렇듯 신자들은 매월 이러한 지향을 가지고 기도함으로써 인류가 직면한 크나큰 도전과 위기를 깨닫게 되고, 기도와 봉사를 통해 그들의 삶을 봉헌하도록 초대받는 것이다.11)
‘기도의 사도직’의 영적 여정은 예수성심의 사랑을 찾아가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으로, 내 일상으로 그리스도의 사도로 파견되는 것이다. 그분과 인격적 만남을 통해 우리에게는 필연적으로 회심이 일어나는데, 참된 회심이 있게 되면 이웃과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이웃과 세상의 아픔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예수성심의 지상 대리자이신 교황님의 마음에 따른 매월 기도지향을 온 교회와 함께 기도드리고, 이웃과 세상 구원을 위한 교회의 사명을 일상에서 함께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명은 온 세상을 향한 예수성심의 사랑이며, 그분의 연민과 열정의 사명이다.
따라서 기도의 사도직 회원들은 교황님의 매월 기도지향을 함께 기도드리는 ‘기도의 네트워크’이며, 예수님의 마음인 예수성심, 교황의 마음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로 잇는 ‘마음의 네트워크’로 전 세계적인 ‘영적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 관련 글: 7. 마음의 길, Way of the Heart 3) '인류가 직면한 도전과 교회의 사명'
교회와 함께 하는 기도 12)
우리는 세상과 교회의 필요에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드린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께 생명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한 형제가 되었기 때문에 세상 구원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며 딸이기에 우리 각자는 그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세포이기에 교회와 밀접히 결합되어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성부로부터 받은 것과 같은 사명을 받았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오 5,14),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코 16,15)
교회는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 서로 다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만, 기도는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길이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과 같이 활동적인 사도들과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같은 관상 수도회의 수녀들도 기도했고, 각자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였다.13) 각 가정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나 먼 곳으로 떠난 선교사들 모두 기도를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도와 하나 되어, 세상을 위한 사도가 되는 것이다.
이는 기도의 사도직 회원들이 성체성사 안에서 온 세상을 위해 성부께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일상의 삶을 봉헌하고 교황님의 지향을 기도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지향은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교회와 세상의 필요를 반영하고 있으며, 교회와 세상을 전체적인 안목에서 볼 수 있는 세상의 목자이며 베드로 성인을 잇는 후계자의 마음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 성심의 세상을 향한 끝없는 연민과 사랑이다.
1992년 6월 1일, 요한 바오로 2세는 기도지향을 맡기면서 기도의 사도직에 주는 당신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예수성심을 통해 사랑과 용서 그리고 구원의 예수님 사랑을 사람들이 알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예수성심을 통해 교회는 항상 악을 단죄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함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예수성심을 통해 기도의 사도직과 보속의 의무를 행함으로써 당신 구원사업에 동참하도록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응당 '기도의 사도직'은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피조물을 사랑하시면서 피조물에게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무한하신 성심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것
둘째, 미사, 영성체 그리고 제대 위에서 재현되는 성사의 신심을 통해 심원한 성체성사를 공경하고, 성체성사에 계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지속적으로 인식하는 것
셋째, 예수님 스스로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St. Margarita Maria Alacoque)에게 전한 메시지와 같이, 희생과 고통을 통해 보속을 행하는 것입니다."
11) 4. ‘기도의 사도직’ 역사 4) '교황님 기도지향' 참조
12) 《Prayer and Service》 ‘기도의 사도직’ 로마 총사무국, 1994년 12월호.
13) 두 성인은 모두 선교의 수호성인이며, 기도의 사도직 수호성인이다.
'기도의 사도직' 영성 정리
‘기도의 사도직’은 기본적으로 성체성사와 세례성사에 바탕을 둔 영성이다.
‘기도의 사도직’은 기본적으로 성체성사와 세례성사에 바탕을 둔 영성으로, 회원들은 아래의 영성을 살아간다.14)
1. 매일 봉헌기도와 성체성사의 삶 - 각자 일상의 삶에서 미사성제와 하나 되어 보속과 희생의 삶을 살아감.
2. 예수성심께 대한 신심
3. 성모성심께 대한 신심 - 사도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의 일치
4. 교회와 함께하는 마음 - 교황님의 매월 기도지향
5. 기도하는 영혼
-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다.(예수성심)
- 우리의 일상을 봉헌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 드리고,(성모성심) 회심의 삶을 살아간다.
- 예수님의 사랑은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들에게 온전히 드러난다.
- 우리의 일상을 성체성사에서 이루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하나 되어 살아간다.(희생과 보속의 삶, 타인을 위한 삶)
-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채운다.
- 예수님의 마음, 성모님의 마음과 하나 되어 일상의 삶을 살아간다.
-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그분의 사랑을 전한다.(매월 교황님 기도지향)
기도의 사도직 로마 본부는 2014년 재창조(recreation)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아래와 같이 ‘기도의 사도직’ 사명을 정리하였다.
- 사도적 준비성 및 유연성(Apostolic readiness and availability)
-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에 협력
- 예수성심이 상징하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
- 범세계적 기도 네트워크를 통해 교회의 사명에 봉사
- 하느님 나라의 사랑과 정의를 위한 봉사
14) 기도의 사도직 정관(1968)
'기도의 사도직' 전대사
교황청 내사성은 명시적이고 고유한 사도적 권위로 아래와 같은 때에 전대사를 내린다.
1967년 1월 1일에 공포된 교황령 Indulgentiarum doctrina(대사에 관한 교령)에 따라, 교황청 내사성(the Sacred Penitentiary)은 아래와 같이 기도의 사도직 회원들에게 전대사의 은총을 부여하였다.(Apostolic Penitentiary, Rescript N. 833/68/R, 19 Feb. 1968)
교황청 내사성은 명시적이고 고유한 사도적 권위로 ‘고백성사와 영성체 그리고 교황 성하의 지향에 따른 기도’를 합당하게 바치고, 적어도 개인적으로 ‘기도의 사도직 정관’17)을 신실하게 준수하겠다는 약속 또는 이를 갱신하는 회원들에게 아래와 같은 때에 전대사를 내린다.
1) 회원으로 가입한 날 혹은 예수성심께 자신을 봉헌하는 날
2) 예수성심 대축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12월 8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대축일(12월 3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6월 29일)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봉헌을 갱신하는 날
이 특은은 별도의 서한이 없는 한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 ACTA ROMANA SOCIETATIS IESU Vol. 15 p189
바오로 6세 교황께서 이렇듯 ‘기도의 사도직’ 회원들에게 지속적인 전대사 은총을 주신 것은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기도의 사도직’ 회원이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일 것이다.
기도의 사도직 회원들은 2)에서 지정한 날짜에, 전대사의 일반적인 조건인 ‘고해성사’, ‘영성체’, ‘교황님의 지향에 따른 기도’(매월 교황님 기도지향)를 드리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 미사는 개인적으로 전대사의 지향을 가지고 참석할 수 있는 지역의 어떤 미사든 참석하면 된다.
※ 서울 예수회센터에서는 매년 예수성심 대축일(6월), 그리스도 왕 대축일(11월)에 ‘기도의 사도직’ 회원들을 위한 전대사 미사가 있다. 구체적인 일정은 다음 ‘기도의 사도직’ 카페 공지사항에서 매년 확인할 수 있다.
17) 다음 ‘기도의 사도직’ 카페 자료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