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복음 묵상 - 웹기도실
매주 복음 묵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2022년 월 일 복음부터 시작합니다.
복음 묵상을 통해 우리는 그분과 인격적 만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적어도 1 주일에 한 번은 시간을 내어 주일복음을 묵상하며, 그분께서 지금 내게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올리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복음 내용 묵상 요점 복음 묵상
'복음 내용'에는 주일 복음이 있으며, '묵상 요점'에는 복음에서 특별히 함께 생각해볼 요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 묵상'에는 묵상 내용이 있습니다.
각 복음서별 묵상 안내는 아래 링크를 참조하십시오.
복음묵상 안내
이냐시오 영신수련 복음 관상에 따른 묵상 안내입니다.
컴퓨터 앞이나 휴대폰으로 기도를 한다면,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질 것입니다. 특별히 주위에 사람들이 많거나 소음이 많은 환경에서는 더욱 그렇게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어디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 모든 곳에, 심지어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조차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당신의 인자하신 손길을 보내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조금만 노력한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웹페이지에 소개하는 기도는 이냐시오 영신수련의 복음 관상을 기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컴퓨터 앞이나 휴대폰으로 기도 드릴 수 있도록 여러분을 도와드릴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단계 그리고 특별히 그날 선택된 성경 구절을 묵상하는 단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래는 이 웹페이지에서 소개하고 있는 단계별 기도입니다.
비록 성경은 오래 전에 씌여졌지만, 그 구절들이 지금 나에의해 읽혀지기 보다는 바로 나에 의해 지금 여기서 씌여지는 것입니다. 이 웹페이지에서 소개한 방법은 여러분들이 하느님과 만나고 또 여러분들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훈련입니다.
하느님의 현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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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인식
누군가 당신에게 하느님의 다른 이름을 묻는다면 당신은 '현존'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현존'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모세가 야훼를 만나 당신의 이름을 물었을 때 야훼께서는 "나는 곧 나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곧 "나는 현존하는 이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그 곳에 너를 위해 있으리라". 하느님은 이 세상 모든 것에 현존하고 계시며 특히 우리 인간들 안에 더욱 친밀하게 현존하고 계신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를 '임마누엘'이라고 부른다. 이는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또한, 마태오 복음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약속으로 끝을 맺고 있다.(from "Finding God in All Things" by Brian Grogan SJ)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것은 우리 기도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때론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기도가 될 수 있다.
아무런 말이나 생각도 없이 그저 빈 마음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어둠 속에서 나를 비추시는 하느님 은총의 빛줄기를 상상하거나 미소를 지으신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의 기운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또한 온 세상 하나 가득 넘쳐흐르는 하느님의 사랑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예수성심이라는 바다 속에 내 전존재를 담그고 우리의 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느껴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 삶이 곧 하느님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하루 만나게 되는 모든 사건들과 사람들 그리고 모든 사물들 안에 현존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찾아보자. 하느님은 어디든 계시다.
지금 당신이 있는 바로 이 자리에 하느님께서는 현존하고 계신다.
온 세상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며 나를 위해 쉼없이 일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느껴 보자. 우리를 감싸고 있는 자연 그리고 도시의 빌딩 속에서 또한 매일의 삶 안에
구체적으로 현존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느껴보자. 우리의 기쁨과 행복, 우리의 어려움과 고통 그리고 우리의 나약함과 죄악조차…
잠심潛心에 대하여
우리 현대인들은 복잡한 환경 속에 지내면서 우리의 내면에는 이미 동적인 리듬이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가 정적인 리듬을 되찾기란 쉽지 않다.
필자 역시 적지않은 시간 사회생활을 하다가 퇴직하자마자 수도원에 입회를 하고나니 가장 어려웠던 것이 정적인 리듬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내 정신은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는데 주위 환경은 너무나도 정적이기에 리듬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직장 생활을 하면서 기도를 하기 위해 성당을 찾아가면
15분만 지나도 정신이 혼란스럽고 요동을 쳐서 도저히 계속 앉아 있지 못하고 뛰쳐나오던 생각이 난다. 그러던 내가 수도원에 와 정적인 환경 속에서 갑자기 매일 한 시간 이상
기도를 하려하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수도원에 들어 와서 처음 가졌던 3일 침묵피정 역시 그러한 동적인 리듬에 익숙한 내게는 침묵 그 자체만으로도 어려웠다.
그만큼 나의 정신이 동적으로 형성되어서 정적인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동적인 리듬은 스트레스를 주는 요소로 다가올 수 있다. 우리들은 바쁘게 움직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차분하고 안정된 정신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복잡한 세상에서 이것저것에 휩쓸리지 않고 나의 중심을 잡는 것이며, 내 안의 평화로움과 고요함을 의미한다. 우리 정신의 이러한 평화로움과 고요함은 우리 영혼을 위해
또한 우리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도 유익할 것이다. 이러한 정적인 리듬을 갖기 위해서는 이따금 그러한 환경을 찾거나 의도적으로 그러한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를 위해, 우리가 신체 단련을 위해 운동을 하고 또 하느님께 대한 우리 영혼의 감각을 단련하기 위해 영신수련을 하듯이 우리의 혼란한 정신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훈련이 필요할 수 있다. 위에 언급된 연습들은 바로 그러한 훈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적인 고요함을 통해 영혼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이들에게 이러한 것들이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며, 이미 그러한 정적인 리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연습이 필요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연습이 우리가 정적인 리듬을 찾기 위한 유일한 방법도 아니다. 따라서 위에 언급한 연습들은 단지 참조하여 필요한 만큼 여러분들의 기도에 이용하면 될 것이다.
느낌 연습
의자에 등을 기대고 허리를 똑바로 세운체 편한 자세로 앉는다. 발을 앞에 가지런히 놓고 양손을 허벅지 위에 가볍게 올려놓는다.
이 때 몸은 힘을 빼고 편하게 쉬는 자세를 취하지만 허리가 굽어지지 않도록 한다.
눈을 감거나 또는 앞의 어느 한 부분에 고정시킨다. 이제 모든 주의력을 몸에서 느끼는 것에 집중한다. 발끝에서부터 어떤 느낌을 느끼기 시작하여 천천히 위로 올라 갈 수도 있고
또는 손끝에서부터 느낌을 느끼기 시작할 수도 있다. 이 때 어떤 느낌을 갖는 신체의 부분이 발견되었을 때는 그것이 어느 부분이던지 몇 초간 그 느낌에 머물도록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여러분의 모든 집중력을 몸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이동시킨다. 이 때 한 곳에 오래 집중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집중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느낌이다. 그리고 어떤 불편함을 느끼거나 가려움 또는 위치를 옮기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저 "아, 내게 지금 이런 느낌이 있구나! 괜찮아, 뭐 별거 아니야"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며 그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즉, 그 불편함과 싸우려 하지도 말고 또 마음에 붙잡지도 말고 그저 왔다가는 흘러가도록 내버려둔다. 그리고는 위치를 옮기지 말고 계속해서 우리의 주의력을 느낌에 집중시킨다.
이러는 동안 우리의 정신은 오래지 않아 여러 가지 질문과 생각을 시작할 것이다: "이거 괜히 시간 낭비하는 것 아니야?", "이게 도대체 기도랑 무슨 관계가 있지?",
"이런 것들은 힌두교에서나 하는 것 아니야?", "도대체 뭘 위해 이런 것들을 하는거야?" 이러한 질문이나 생각들은 앞서 몸의 불편함을 다루듯이, "아, 내게 지금 이런
생각이 드는구나! 그래, 괜찮아, 뭐 별 일 아니야"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며 생각들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즉, 그 생각들과 싸우려 하지도 말고 또 마음에 붙잡지도 말고
그저 왔다가는 흘러가도록 내버려둔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우리의 주의력을 느낌에 집중시킨다.
만일 원한다면 이러한 훈련을 하면서 구체적인 기도로 이용할 수 있는데, 이 때 우리는 사도행전 17장 28절에 있는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라는
구절을 반복하면서 느끼는 연습을 계속할 수 있다.(adapted from "God of Surprises" by Gerry W Hughes SJ)
호흡 연습
이 훈련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육체의 감각에 우리의 모든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연습이다. 이 때 주의할 것은 일부러 호흡의 리듬을 변화시키지 않도록 한다.
우선 숨을 들이쉴 때 코로 들어가는 차가운 공기의 느낌과 숨을 내 쉴 때 따뜻한 공기의 느낌에 우리의 주의력을 집중시킨다. 처음에는 호흡에 대해 의식을 하게 되고 또 호흡이
불규칙하게 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호흡이 멈추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면 이러한 연습은 맞지 않는 것이니 계속하지 않도록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훈련을 하면서 호흡의 패턴이 변화되고 또한 호흡이 깊어지고 점차 늦어지면서 졸림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우리의 긴장을 풀어 주는 좋은 훈련이다. 이 때 우리가 이러한 훈련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기도에 이용하고자 한다면,
호흡을 들이쉴 때 여러분이 바라는 모든 원의를 포함시키고, 숨을 내쉴 때는 여러분들이 하느님께 내어 드리고 싶은 모든 것들 그리고 여러분들의
걱정, 근심, 실망, 욕심 그리고 죄까지 포함하여 내보내도록 한다.
이렇게 숨을 내쉴 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저 여러분들의 집중력을 자신이 내어 드리고자 하는 열망에 집중하도록 하며,
그러한 것들을 우리 안에 붙잡아 두지 않도록 한다.(adapted from "God of Surprises" by Gerry W. Hughes SJ)
듣기 연습
의자에 등을 기대고 허리를 똑바로 세운체 편한 자세로 앉는다.
이제 들리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여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저 듣기만 할뿐 그 소리에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는 것이다.
즉, "아, 이건 무슨 소리구나!", "이 소리는 좀 특이한데 뭐지?" 등등.
희미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그리고 보다 가까이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어본다. 그저 들으면서 소리를 느껴보는 것이다.
심장의 박동 소리를 들어본다. 약하지만 우리 자신의 생명의 리듬을…
이제 기도하고 있는 장소의 침묵의 소리를 들어본다. 그리고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몇 분간 계속하여 본다.(adapted from "Praying in Lent" by Donal Neary SJ)
지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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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 - 준비 기도
"우리의 모든 지향과 행동 그리고 노력이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께 봉사함을 위하여서만 마련되도록 하느님께 은총을 청함." (영신수련 46번)
이냐시오 성인은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온전히 열어 드리고 그 분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도록 준비기도를 권한다.
즉,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와 함께 하여주시고 특별히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나를 인도해 주시기를 청하며,
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내게 하느님께 봉사하려는 열망을 불러 일으켜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당신께서 내게 하시려는 말씀을 듣고, 우리를 온전히 하느님의 처분에 내어 드릴 수 있도록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기도 전에 묵상하고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열매를 기도를 통해 얻곤 하는데, 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열고 성령께서 자유로이 우리의 마음을 거니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지향을 위한 기도라 함은 우리의 의지 그리고 열망조차도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기를 청하며 하느님께 나를 온전히 내어 드리고 그 분의 뜻을 경청할 수 있기를
또한 주님께서 내가 드리는 기도와 함께 하여주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그럼으로해서 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릴 수 있기를 청하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특별히 이 기도를 통해 얻고자하는 열매를 청할 수도 있다.
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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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주님의 말씀을 들음
성서 구절을 천천히 몇 번 읽는다. 만일 어떤 단어나 구절이 마음에 머문다면, 다른 구절로 넘어가기 전에 원하는 만큼 충분히 그 단어나 구절과 함께 머문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달콤한 사탕을 입안에 넣고 맛보는 것과 같다. 우리가 사탕을 깨물어 먹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맛을 보기도 전에 사탕의 성분을 분석하지 않는 것처럼
그 구절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종종 어떤 구절은 우리의 의식이 깨닫기도 전에 우리의 직관이 먼저 그 구절 안에 한동안 갈증과 위안을 느끼며 머물게 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어떤 구절을 분석하지 않고 가능한 오래 동안 그 구절과 함께 머무는 이유이다.
아마도 우리 마음 안에는 온갖 종류의 분심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몇몇 생각들은 분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도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성서 구절이 우리 의식의 흐름 위에서, 즉 우리의 생각, 기억, 상상, 희망 그리고 온갖 두려움 위를 비추는 길잡이와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생각들과 감정을 섞어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분심에 대하여
기도를 하면서 우리 안에는 여러 가지 의문과 분심으로 가득 찰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나는 하느님께서 참으로 이 성서 구절을 통해 나와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나는 참으로 하느님께 진실된 믿음을 갖고 있는가?"
사실 이러한 질문들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질문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잠시 그 대답을 접어 두도록 하자. 아이가 어둠 속에서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 아이를 포근하게 안으며, '괜찮단다, 아이야'라고 위로할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평온을 되찾고 어머니 품 안에서 편안히 쉬게 된다.
그런데 만일 그 아이가 너무나도 영리해서, '어머니, 이 구절에는 어떤 인식론적 형이상학적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 논리를 증명하기 위해 어떤 경험론적인 예증을 제시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어머니는 정말로 큰 문제를 품안에 안게 될 것이다.
기도 중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 어떤 질문들이 해결되기 전까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한다면 우리는 그 영리한 아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마음으로 그 분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에 전혀 이성적인 측면이 없다고 우리는 단정할 수 없다.
마음은 때로 우리의 의식이 볼 수 있는 것보다도 더 깊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들을 뒤로 한 후, 이제 우리 마음 안에서 넘쳐흐르는 다른 분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린 때로 가스 불을 켜 놓고 오지는 않았는지 걱정할 수도 있고 아직 보내지 않은 이메일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가스 불처럼 다급한 일이라면 우선 안전하게 가서 체크를 하고, 지금 당장 해야할 일이 아니라면 나중을 위해 간단히 메모해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다른 생각들은 분심이기보다는 오히려 기도에 중요한 소재가 될 수 있다.
혼돈된 마음의 길잡이로서 성서
성서의 첫 구절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는 것은
지나간 과거의 사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재 우리들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기도하면서, 이같이 하느님의 성령을 우리 존재의 혼돈과
어둠 위를 맴돌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가 갖고 있는 온갖 생각과 감정 위를 맴돌 때, 놀라우신 하느님은 우리 안에서 무엇이든 일어나게 하실 것이다.
이 때 우리 내면의 혼돈을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리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감추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들,
특히 하느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기도 안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관념에서 벗어나 우리의 모든 감정이나
생각을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 하느님은 우리들의 그 어떤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도 끌어 안아주시는 무한히 크신 분임을 믿으면서…
하느님은 우리 자신들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시기에 그 분 앞에서 우리 자신을 감추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혼돈을 사랑하시고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분의 성령은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하실 수 있음을 믿을 때,
하느님 말씀의 빛 안에서 기도의 요소가 될 수 없는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들은 없다.
담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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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눔
예수께서 가까이 앉아 나를 바라보고 계시다고 상상해 본다. 이 때 우리는 믿음을 갖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물론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대로 계시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상상은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깨닫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만일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자그마한 목소리로 예수님께 마음을 열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내게 응답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 보자. 그것은 생각과 기도의 차이점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일반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 이야기하게 된다.(Anthony de Mello SJ, "Sadhana")
이냐시오 성인은 이러한 대화를 '담화'라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담화란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또는 어른께 말씀 드리는 것처럼, 어떤 때는 무슨 은혜를 간청하고,
어떤 때는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으로 말씀드리며 또 어떤 때는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에 대해 의견을 구하는 것을 말한다."(영신수련 54번)
담화 중에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내 안에서 일었던 감정들과 생각들을 주님과 나누고 또 은총을 청하는 것이다.
즉, 기도 중에 위안을 얻었는지 아니면 어떤 욕망을 느꼈는지, 무엇인가 소유하려는 열망을 느끼지는 않았는지, 마음이 어느 곳에 머물었는지
그리고 이 묵상을 통해 슬픔을 느꼈는지 아니면 기쁨을 느꼈는지 등을 대화의 소재로 삼을 수 있다. 그리고는 특별히 이 기도를 통해 주님께 원하는 은총을 청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