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성심 신심

예수성심은 우리 신앙의 원천이요, 여정이요, 목적입니다.



※ 영성강좌 “사랑과 고독의 시원, 예수성심(사랑을 찾는 고독의 여정)” 참조


그리스도교 영성의 심연(深淵), 예수성심

“하느님께서 불타는 떨기 속에 나타나시다”(탈출기 3장)

우리가 누군가를 몹시 사랑하게 되면 가슴이 저려 옴을 느낀다. 더욱이 상대방이 내 심정을 알아주지 못한다면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다. "내 마음이 이렇다. 나의 이 애타는 마음을 알아다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심장을 우리에게 내보이신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단순히 고문당하는 한 사람의 육체적 고통으로만 묵상할 수는 없다. 예수님 수난의 본질은 상처받으신 당신의 마음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가리타 성녀께 발현하시어 보여주신 당신의 심장에 십자가, 가시관, 창에 찔리신 상처가 있으며, 이 모든 고통이 당신의 불타는 사랑임을 보여주셨다. 이렇듯 예수성심에는 십자가의 수난과 사랑이 모두 포함되어있다. 당신의 고통이 바로 마음의 상처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난을 우리는 예수님의 심장이, 마음이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못 박히시고, 죽으시는 고통으로 묵상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마음의 상처는 결국 우리를 향한 당신의 그리움과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열정이 육화하셨기에 예수님의 육체는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열정이며, 그분의 사랑과 열정은 예수님의 마음, 예수성심으로 집약된다.

그분의 성심은 한없이 넘쳐흐르는 사랑의 샘물이며, 영원한 사랑의 실체이다. 우리가 믿는 신은 위대하다. 그 어떤 종교가 자신을 섬기는 인간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가! 세상 사람들은 여러 신들을 믿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그들의 신은 스스로를 위해 인간을 지배하거나 축복과 징벌을 주는 힘 있는 신이기에, 인간은 그저 복종해야 하는 심판관이자 감독관일 뿐이다.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신도 결코 인간을 위해 죽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신은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자신이 창조한 인간들을 위해 수난 당하시고 죽임까지 당하시는 다른 신들과는 비교도할 수 없는 사랑 가득하신 신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은 위대하다. 자신이 만든 질그릇을 아끼고 사랑하는 옹기장이는 많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질그릇과 사랑에 빠지고 질그릇을 위해 죽는 어리석은 옹기장이는 없다. 우리가 믿는 신은 바로 그런 분이다. 안셀모 성인의 말대로 우리는 그분의 고통으로 구원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으로 구원된 것이다. 우리의 기도 또한 십자가의 고통을 향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시는 그분의 사랑을 향해 드리는 것이다.

그분의 실체는 불타는 사랑이시기에,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보았던 불은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당신의 실체 안에서 예시(豫示)하신 것으로, 그것은 불타는 예수성심의 사랑이다.(탈출기 3장 “하느님께서 불타는 떨기 속에 나타나시다”) 예수성심은 모든 그리스도교 영성의 심연(深淵)이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원(始原)으로, 예수님의 마음은 곧 하느님의 마음이다. 그분의 마음은 또한 우리들 마음 안에 머무시며 세상에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다.

우리는 교회의 모든 성사가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에서 흘러나왔다고 배웠다.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마음, 심장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성심, 예수님의 마음, 그분의 연민 어린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그분과 친밀감을 형성하고 그분과 함께 인생의 여정을 걸으며 그분 사랑과의 일치를 향해 나아가기에, 예수성심은 우리 신앙의 원천이며, 여정이며, 목적이다.


예수성심의 역사

예수성심 신심은 예수님께서 직접 발현하시어 확인하여주신 신심이다.

예수성심 신심은 개인적인 신심에 머물다가 12~14세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묵상이 활기를 띠면서 유럽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 대표적인 인물로는 성 베르나르도(1090~1153), 성 보나벤투라(1217~1274), 성녀 제르투르다(1256~1302), 성녀 가타리나(1347~1380)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 신심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계기는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의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et Mary Alacoque, 1617~1690)와 성녀의 영적 지도신부였던 예수회의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Claude La Colombiere) 성인을 비롯한 예수회 사제들에 의해서이다. 오늘날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개념은 일반화되어 누구나 이야기하고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얀세니즘(Jansenism)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두렵고 엄한 감독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발현하시어 ‘나는 사랑 가득한 사람이다’라며 당신의 성심을 드러내신 것이라 생각된다. 교회 내 왜곡된 하느님 사랑의 이미지는 예수성심 발현 이후 점차 제자리를 되찾게 되었다.

예수성심 신심은 예수님께서 직접 발현하시어 확인하여주신 신심이다.21) 마르가리타 성녀는 1675년 환시를 통해, “(1) 예수성심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이다. (2) 예수성심은 사람들의 무관심, 모욕과 냉소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잊고 사랑을 배신한 사람들에 의해 상처를 받으셨기에 희생과 보속을 통해 사랑의 상처를 기워 갚아라. (3) 매월 첫째 금요일에 영성체를 하고 매월 첫째 목요일 밤에 예수성심의 수난을 묵상하는 성시간을 가짐으로써 상처 입은 성심을 위로하라. (4) 성체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성심을 공경하는 축일을 지내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사랑으로 응답하며 예수성심을 위로해 드리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저버린 모든 이들을 위한 보속의 삶을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성심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그분께 상처를 드리고 있는 세상 모든 이들의 죄를 보속하고, 그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드리며, 그분의 사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성시간 전례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에 의해 시작된 후, 1829년 예수회 로베르 드브로스(Robert Debrosse) 신부는 이 신심을 전파하기 위한 단체를 프랑스 파레-르-모니알(Paray-le-Monial)22)에 창설하였다.

1765년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축일이 공식적으로 인가되었으며, 1856년 비오 9세는 지역교회 차원에서 지내던 예수성심 대축일을 보편교회로 확대하였고, 1899년 레오 13세는 예수성심께 전 인류를 봉헌하는 회칙을 발표하였다. 20세기 초 예수성심을 만물의 임금으로 섬기는 신심이 태동하였는데, 이에 1925년 비오 11세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제정하여 레오 13세에 의해 시작된 예수성심 대축일에 드리는 온 인류의 봉헌이 매년 갱신되기를 원했다. '성심의 교황'이었던 비오 12세는, 예수성심 대축일 제정 100주년이 되는 1956년 예수성심 신심을 신학적으로 제시한 회칙 「물을 길으리라」(Haurietis Aquas)를 발표하며 "예수성심 신심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는 가장 효과적인 학교"라고 강조하였다.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예수성심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신심”임을 강조하였다. 사실, 그리스도교를 논하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제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반드시 언급하여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21) L. Levesque, 《예수성심 공경의 기원과 목표》 김정옥 譯, 예수성심시녀회, 2003, 257쪽 참조.
22) 마르가리타 성녀가 예수성심 발현을 뵈었던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원이 있는 프랑스 중부 마을.


예수성심과의 인격적 만남

We do not believe in something, but we do believe in someone.

모든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육화하시어 우리 가운데 머무신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같은 따뜻한 심장을 가지시고 우리와 인격적인 만남과 사랑을 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우리가 믿는 신을 사람으로 만나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하느님을 믿는다. 하지만 그들은 감히 자신들이 믿는 신을 인간으로 만나지 못한다. 오로지 그리스도교만이 자신이 믿는 신을 인간으로 만난다.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2000년 전 나자렛의 예수라는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종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이며,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마음, 예수성심으로 집약된다. 따라서 예수성심은 하느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인성이 만나는 곳으로, 하느님께서는 예수성심, 예수님의 마음을 통해 우리와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신다.

우리의 관계에는 단순히 알고 있는 사람이 있고 인격적인 관계가 있다. 신문이나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저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 뿐, 우리와 아무런 인격적인 관계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그저 머리로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에 대한 지식과 정보만 알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지 결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라 말할 수 없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어떤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기쁨과 슬픔이 있는지 알며,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며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세상에서 사람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과도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믿는 신을 반드시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우리와 같은 따뜻한 심장을 가진 한 사람으로 만나 그분과 인간적인 감정의 교류를 하여야 한다.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감정의 교류가 없다면 그것은 건조한 사무적 만남일 뿐이며 피상적인 관계일 뿐이다. 우리의 기도가 참된 인격적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 안에서 그분과 감정의 교류가 있어야 한다. 마음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연출된 의례적 행위가 아니라 인격적 만남이기 때문이다.(‘Encounter, Not Performance’ Frank Wallace, S.J.) 그것은 곧 예수님의 마음, 예수성심과의 만남이며, 우리는 따뜻한 심장을 가진 한 사람에게 기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머리로 기도하지 말고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이 인격화하신 분이기에 우리는 기도를 통해 그분과 인격적인 사랑을 나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누군가를 믿는 사람들이다.(‘We do not believe in something, but we do believe in someone.’ Thomas H. Green, S.J.)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 도덕 규범이나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이나 단순히 그분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한 사람을 믿는 종교이며, 무엇보다 그분을 사랑하는 종교이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을 따라갔을 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시어 그들에게 물으셨다. “무엇(something)을 찾느냐?”(요한 1,38)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물으신다. “누구(someone)를 찾느냐?”(요한 20,15) 우리도 처음엔 무엇(something)을 찾아왔지만, 이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someone)를 찾는다.(Thomas H. Green, S.J.)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적 여정이다. 내게는 하느님의 위로가 필요한가? 위로의 하느님이 필요한가?(Frank Wallace, S.J.) 우리는 무엇(something)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누군가(someone)를 찾는 사람들이다. 예수성심이 바로 그 someone의 결정체이다.

이렇듯 우리는 신앙 여정을 통해 하느님을 인격적인 관계로 만나며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 신앙의 일차적인 목표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특별히 이냐시오의 복음관상을 통해 우리는 복음을 단순히 지식과 정보가 있는 텍스트가 아닌 인간의 감정라인을 가지고 묵상한다. 성경을 묵상하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 규범을 알기 위함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고, 심지어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있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는 이유는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 위함이다.(Thomas H. Green, S.J.) 세례 역시 인간의 보편적 선(善)을 내 규범으로 삼고자 단순히 인생의 가이드라인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의 윤리적 개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분 마음과의 인격적 만남을 위한 것이기에,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은 우리 신앙에 중요한 요소이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다

열매를 청하지 말고 먼저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기를 청해야 한다.

우리가 피정을 다녀온 직후에는 불편한 사람들을 대할 때 평소와 달리 관대하게 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곤 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전처럼 그 사람이 또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일까? 답은 바로 그 안에 있다. 피정 때는 온통 하느님 생각으로 나를 채워 내 안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하느님의 사랑을 버리고 내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에서도 지속적인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를 통해 그분의 선하심과 거룩함을 마음에 담아야 한다.

사랑하고픈 사람이 어느 날 나를 찾아와 먼저 내게 사랑을 고백한다면 얼마나 황홀한가! 그때는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고, 마치 사랑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일 것이다. 이때는 누구나 어떤 일에든, 어떤 사람에게든 관대하다. 늘 싱글벙글하고 기쁨으로 가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주님과 사랑에 빠져도 우리는 온종일 그분 생각과 기쁨으로 가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문다는 의미이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이것은 내가 주님께 사랑받는 존재임을 느끼면서, 주님 사랑 가득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때 우리의 현존 자체는 곧 기도가 된다. 우리에게는 이 같은 사랑 체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슴 뜨거워지는 기쁨 가득한 순간, 이것이 예수성심의 체험이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있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을 때, 세상과 사람들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바로 그 체험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과의 인격적인 사랑 체험이다.

사실 우리 스스로 누구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사랑이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을 만들어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나를 채우고 그분 평화 안에 머물며 그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사랑으로 채워져야 한다. 열매를 청하지 말고 먼저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기를 청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이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4-5)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마태오 5,39)는 말씀을 우리가 그저 텍스트나 교통신호등과 같이 지켜야 할 규정으로만 본다면 절대 실천할 수 없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 때만 가능하다. 그건 사랑의 힘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성심이 답이다!” 많은 이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내가 하려고 하니 어려운 것이다. 인간은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다. 나는 그저 겸손하게 빈자리를 그분께 드리고 그분께서 일하시도록 맡기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오 19,26) 그래서 우리는 "주님, 제게 당신 사랑을 주소서"라고 겸손되이 기도드린다. 그분의 사랑이 내게 가득하면 그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은 예수님의 마음, 예수성심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며 그분 사랑으로 가득하면 그 사랑이 넘쳐 이웃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그만큼 살아가지는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본다. 그것은 마음 안에 주님의 사랑은 있지만 넘쳐흐를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성심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내 마음 안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청한다.


어떻게 예수성심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을까?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역시 이해가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다.

단순히 강의를 듣는다고 나의 영적 깊이가 저절로 심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강사나 필자의 체험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하느님 체험이 필요하다. 강사나 필자가 머리로 이해한 것은 말이나 글을 통해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있지만, 마음과 느낌으로 체험한 것은 쉽게 설명할 수가 없다. 지식과 정보만으로 사랑할 수 있나? 머리가 아닌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정보화된 현대의 우리는 이미 구원되고도 남을 충분한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나를 구원으로 이끌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머리로 그분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체험은 그 느낌과 감정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예수님 사랑으로 가슴 뜨거워지는 체험이 필요하다.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 역시 이해가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다.

언젠가 한 분이 찾아와 “참으로 회심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머리로는 다 아는데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참된 회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우리는 어떻게 참된 회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회심은 단순히 인간의 보편적 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분께 되돌아오는 것이며 한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내 사랑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사람은 참으로 사랑받는 체험을 할 때 변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머리로 이해할 때가 아니라 마음으로 체험할 때 비로소 변화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체험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가?

그것은 기다림이다. 성령의 바람이 언제 어떻게 어디로 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무지의 구름’ 작가는 책에 이렇게 썼다. “누군가 ‘그렇다면 어떻게 제가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은 나도 모릅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no. 34) 그렇다. 그것은 오로지 성령의 은총이기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분만이 하시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기다릴 뿐이다.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당신께서 원하시는 그때를 기다릴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바로 시메온과 한나와 같이 믿음과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것이다. 시메온은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말씀을 신뢰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주님, 이제야 제가 당신의 구원을 보았습니다”라며 기뻐하였다. 또한 한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주님을 섬기며 기도하고 있었다.(루카 2,25-38) 우리는 바로 시메온과 한나와 같이 믿음과 인내심을 가지고 성전에서, 주님 안에서 성령의 바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예수성심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은 한 사람과의 인격적인 만남이기에 결코 지식과 정보만으로 체험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성심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할 수 있을까? “기도하십시오!” 성령께서는 분명 예수성심의 사랑을 체험하게 해주실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문제는 주님의 뜻과 내 뜻이 다를 수 있지만, 이러한 기도는 주님의 뜻과 내 뜻이 온전히 일치하기에, 아니 오히려 나보다 그분이 더 원하시기에 반드시 들어주신다. 다만 그분이 원하시는 때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나와 시메온처럼 믿음과 인내심을 가지고 영적 열망과 갈망의 애절한 기도를 그분께 드리는 것이다.

영성의 필수적 요소, 의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회심과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하는데, 왜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반드시’ 하겠다는 애절한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해보았는가? 우린 그저 “그렇게 살고 싶다. 하지만 나의 나약함 때문에 할 수 없다”는 생각만 하고 있지 않은가! 운동을 악착같이 연습한다고 모두 성공하는가? 일을 악착같이 한다고 모두 성공하는가? 악착같이 해도 될까 말까 한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 애절한 열정도 없이 단순한 바람만으로 참된 회심을 할 수 있겠는가!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기 6,5) 이것이다. ‘의지’는 우리의 영성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러한 ‘의지’가 없기에 영적 체험을 한 사람들도 다시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이며,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오 7,26)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르코 4,18-19) 체험을 한 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흐르는 물 위의 오리처럼 그냥 떠내려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루카 11,23) 하지 않으면, 흩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그냥 사랑하면 안 된다. 힘을 다해 사랑해야한다. 적당히 여분의 사랑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회심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일상의 유혹이나 무료한 일상에서도 힘을 다해 의지적으로 사랑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영적 여정에는 세 포인트가 있다. 그것은 ‘부르심(세례)’, ‘체험’, ‘의지’이다. 여기에는 벽이 2개가 있다. 하나는 ‘부르심(세례)의 벽’이고, 다른 하나는 ‘의지의 벽’이다. 이것을 깨야 한다.

우리는 이미 ‘부르심(세례)의 벽’을 깨었기에, 이제 ‘의지의 벽’을 깨야 한다. 그저 뜨거운 체험을 하고 또 식어지는 것을 반복하며 ‘체험’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물론 이러한 의지를 갖는 것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오 19,26)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코 9,23) 그래서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겸손하게 의탁하는 것이 중요하다.

토마스 그린(Thomas H. Green) 신부는 기도의 3단계를 ‘알아가기, 체험하기, 사랑하기’라고 말하며 바로 ‘사랑하기’에서 변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부르심을 통해 그분을 알아가고,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며, 의지를 가지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루카 11,23)


예수님의 마음을 위로해드림

“모욕이 제 마음을 바수어 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동정을 바랐건만 허사였고 위로해 줄 이들을 바랐건만 찾지 못하였습니다.”(시편 69,21)

“모욕이 제 마음을 바수어 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동정을 바랐건만 허사였고 위로해 줄 이들을 바랐건만 찾지 못하였습니다.”(시편 69,21)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고통 속에 기도하시던 중 제자들을 찾아가신다.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가셨을까? 인간적인 위로가 필요하셨던 것이다. 당신의 수난과 고통을 함께하며 당신 옆을 지켜줄 사람을 찾으신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선포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세례를 받을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도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며, 특별히 겟세마니의 제자들처럼 위로를 받으시고자 당신께서 택하시어 세례성사를 주신 사람들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처럼 따로 부르신 것이다.(마르코 14,33)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에 그분과 함께하며 그분의 마음을 위로해드리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상처받으신 예수성심을 위로해드리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첫째, 그분의 마음을 공감하며 함께 하다

우리는 아무도 자신의 마음을 공감하지 않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소통이 없을 때 외롭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매달리시어 세상을 내려다보시는데,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일로만 분주하고 아무도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얼마나 극심한 고독감에 빠지실까? 많은 사람들이 미사에 참석하여도 아무도 그분의 마음을 공감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또 외로우실 것이다. 골고타 언덕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렸을까? 모였다고 모두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공감할 때, 그분은 위로를 받으실 것이다.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도 누군가 내 감정을 공감할 때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가! 힘들 때, 누군가 함께 아파하기만 해도 우리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 “많이 힘드시지요?”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셨던 예수님의 마음, 그분의 감정을 함께하며 공감하는 것이다.

특별히 매월 첫 목요일 저녁에 지내는 성시간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고통 중에 계시는 예수님 곁에 함께 하며 그분을 위로해드리는 시간이기에, 이때는 그저 그분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2000년 후 지금 우리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시며 위로와 힘을 받으셨을 것이다. 우리의 기도 소리가 2000년 전 그분의 귓가에 맴도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고통 속에 계신 그분의 손을 잡아드리며 그분께 위로와 힘을 드린다. “주님, 제가 지금 당신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예수님께서 당신 마음으로 느끼셨던 연민, 상처, 고통,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내 심장으로, 내 마음으로 느낀다면 그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진흙 덩어리에 불과한 나 같은 미물이 예수님의 심장으로 느꼈던 그 감정을 내 가슴으로 함께 공유하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 하루 나는 예수님께서 마음으로 느끼셨던 감정을 언제 내 마음으로 느끼며 그분과 함께하였는가?

둘째, 그분의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하다

우리가 사랑하던 누군가를 떠나보냈을 때, 만일 그 사람이 나와의 사랑을 모두 잊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허무한 감정을 느낄까? “내가 그런 존재였나? 그동안의 내 사랑은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그분의 사랑을 잊지 않고 미사 때마다 기억한다. 죽음에까지 이르셨던 그분의 고통과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다.

기도 중에 최고의 기도는 미사이다. 그리고 미사의 중심은 성찬례이다. 최후의 만찬, 골고타 언덕 그리고 우리들이 드리는 미사성제는 신비롭게 연결되어 있다. 성찬례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5) 당신의 사랑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찬례를 통해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최후의 만찬 때 당신께서 베푸신 성체성사를 미사 때마다 거행하고 있다. 이는 그분의 죽음과 그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 저희가 당신의 사랑을 이렇게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이렇듯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그분의 마음은 위안을 받으실 것이다.


셋째, 일상의 십자가를 사랑하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달리 우리 그리스도교에는 십자가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십자가를 마냥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 반드시 십자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몬과 같이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는 그분의 협력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시몬은 자기가 무슨 십자가를 지고 가는지 몰랐다. 하늘나라에 가서야 시몬은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주어지는 십자가들이 어떤 십자가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죽은 후에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십자가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신비이다. 신비란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기에 나도 함께 아픈 것이다. 어찌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와는 좋은 일과 기쁨만 함께 나누고, 어렵고 슬픈 일은 내게 말하지 말고 당신 혼자 감당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분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분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할 것이고 일상에서 주어지는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단순히 믿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차이이다.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수는 있어도 사랑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내 일상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분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일상의 십자가가 누군가의 구원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보았는가? 물론 내 십자가와 관련된 누구일 수도 있지만, 내 십자가와 전혀 관계없는 알지 못하는 어떤 이의 구원이 될 수도 있다. 파티마의 성모님께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어린아이들에게 단식과 희생을 권고하시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아이들의 작은 희생이 그들이 전혀 모르는 어떤 이들의 구원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자가는 신비이다.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 구원사업에 함께 하는 것이며, 우리의 희생과 보속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서 받으신 마음의 상처를 함께 하며 그분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다.

여기서 내 일상의 십자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오늘 내게 주어진 삶과 상황을 그 어떤 경우든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넷째, 회심의 삶을 살아가다

회심(悔心)은 단순히 규칙과 규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분께로 되돌아오는 것이다.(not something, but someone) 그래서 회심에는 이미 인격적인 의미가 있지만 이를 강조하여, ‘인격적 회심’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사무적인 관계에서는 규칙을 어긴 것이 죄가 된다. 직장에서는 회사 사규를 어기거나, 회사에 손해를 입혔을 때 죄이다. 하지만 부부관계나 부모와 자녀 관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랑하지 않은 것’이 죄다. 외형적으로 아무런 흠이 없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이 죄이다. 가족은 사무적인 관계가 아니라,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매주 주일미사에 참여하고, 때론 기도도 하고, 규정을 어기지 않았기에 나는 할 바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주님과 우리는 사무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이기에,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이 죄이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을 끊임없이 죄인이라고 고백하였다. 더 사랑하지 못한 것, 더 주님과 함께하지 못한 것, 더 주님과 일치하지 못한 것, 그것이 바로 그녀에게는 죄였던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 당신 사랑에 응답 드리지 못해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이다. “죄는 단순히 규칙을 어긴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율법과 규칙을 어긴 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한 피상적인 결과물이다. 따라서 회심은 인격적 관계의 복원인 인격적 회심이어야 한다.

성인이 된다는 것도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사람을 의미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규칙도 어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죄의 본질은 사랑하지 않은 것이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과 감정으로 그분과 함께하여야만 한다. 따라서 회심은 결국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그분과 우리는 사무적인 관계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이고 친밀한 사랑의 관계이다. 사무적인 관계에서는 규칙이 중요하다. 하지만 사랑의 관계에서는 사랑이 중요하다. 오히려 사랑의 관계에서는 규칙을 어기더라도 서로 신뢰가 있기에 관계를 무너뜨리지는 않는다.

회심을 통해 우리는 상처받으신 예수성심을 치유해드린다. 그것은 나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 인해 받으신 상처이다. 우리가 참으로 회심을 한다면, “세상과 사람들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것은 내 안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때 이웃의 아픔과 세상의 아픔이 보일 것이다.

다섯째, 사랑을 사랑의 마음으로 응답 드리다

그분을 참으로 위로해드리기 위해 우리는 그분께 내 사랑의 감정과 마음을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메마름 중에서도 의지적으로 내 사랑의 감정을 그분께 드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넘쳐흐르는 사랑의 감정으로 마주하듯 있는 것이다. 그분께서 주신 사랑 안에 머무는 것과 내가 사랑의 마음을 일으키어 그분 안에 있는 것은 다르다. 규칙과 규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내게 가득하면, 그 사랑이 넘쳐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그분을 위로해드리기 위해 내 사랑의 마음을 그분께 드린다면, 그것이 곧 기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내 사랑으로 응답 드리며, 일상의 삶에서 그분을 위로해드리고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성심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축복을 받기 위함도 아니고, 벌을 받을까 봐 두려워 계명을 지키는 것도 아니며, 인생이라는 시험을 통과하기 위함도, 인생을 그저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기 위함도 아니며, 단순히 영원히 살기 위함도 아니다. 영원히 사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우리의 신앙은 창조주를 사랑하기 위함이며, 그것은 그분께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은 너무 소극적이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

“나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 안에서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소화 데레사)


예수성심 영성의 요점

‘Encounter, Not Performance’

예수성심 영성의 핵심은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분께 내 사랑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그분의 사랑으로 가슴 뜨거워지는 ‘사랑받는 체험’
 - 주님 사랑 안에 머무름
 - 주님과의 친밀한 인격적 만남
 - 그분의 마음과 함께하며 그분의 마음을 위로해 드림
 - 그분의 사랑을 내 사랑의 마음으로 응답 드림
 - 예수성심과 하나 되어 세상으로, 일상으로 파견됨

‘성시간 전례’와 ‘성체조배’는 우리가 예수성심의 사랑 안에 머물며, 그분을 위로해드리고 내 사랑을 드리는 훌륭한 기도이다.


예수성심과 성모성심

성모성심은 예수성심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예수성심은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내어주신 것이고, 반면 성모성심은 인간의 사랑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이는 곧 예수성심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분께 사랑으로 응답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동전 앞뒷면처럼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은 반드시 함께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심장은 성모님의 태중에서 잉태되셨기에, 성모성심은 예수성심을 품고 계시다. 따라서 성모신심이 깊어지면 반드시 예수성심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직 성모신심은 있는데 예수성심을 만나지 않았다면, 더욱 성모신심 깊이 들어가 성모성심께서 품고 계신 예수성심을 만나야 할 것이다. 성모성심은 예수성심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성화

이 성화는 초대 교회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작가 미상의 이콘으로, 원본은 구속주회 소속인 로마 성 알폰소 성당에 모셔져 있다. 교황 비오 9세는 구속주회 회원들에게 '영원한 도움의 성모 신심’을 전 세계에 전파할 것을 당부하였고, 이에 구속주회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를 만들어 보급하고 있다. 이 성화와 관련하여 한국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있다.

어린 예수는 어느 날 미래에 자신이 겪어야 할 수난의 도구를 들고 있는 두 천사의 환시를 보고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황급히 성모님의 품으로 달려가 안기는 모습이다. 어린 예수의 공포가 얼마나 컸던지 자신의 신발이 벗겨질 정도로 다급히 성모님의 품으로 안기었고, 어머니의 큰 손은 전율하고 있는 어린 예수의 작은 손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그림에서 오른쪽에 있는 천사는 가브리엘 대천사로 십자가와 못을 들고 있고, 왼쪽에 있는 천사는 미카엘 대천사로 창과 쓸개가 담긴 그릇과 해면을 잡아맨 막대기를 들고 있다.)

그림에서 보듯, 삼위일체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 성모님의 품에 안기어 위로를 받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도 이렇듯 두려운 상황에 당신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품으로 피신하여 위로를 받으신 것이다. 따라서 성모님의 품은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예수님조차 피하여 위로를 받으신 실로 어마어마한 품이다.

그렇다면, 이 성화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또한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우리의 모든 두려움과 상처와 고통 중에 성모님께 굳은 신뢰심을 가지고 의탁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분은 언제든 우리를 어머니의 사랑으로 도우시고 위로해 주실 것이다. 창조주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마저 위로를 받으셨던 그분께 우리 또한 어린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신뢰심을 갖고 의탁하는 것이다.

또한 이 성화에서 인간적인 공포심에 휩싸인 어린 예수님을 성모님께서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당신의 따뜻한 사랑과 위로를 주셨듯이,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며 고통과 슬픔,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고독 속에 계신 예수님을 성모님처럼 품에 안고 그분의 마음을 위로해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신 예수님께 인간적인 위로를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성화는 예수님처럼 우리가 고통과 두려움 중에 있을 때 성모님께 의탁하고, 성모님처럼 고통과 고독 속에 계신 예수님을 위로해드리는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예수성심과의 일치는 나 자신과의 일치요, 형제와의 일치이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현현(顯現)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그분 사랑의 현존이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현존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찌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겠는가! 인간의 모든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현현(顯現)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사람들을 통해 세상에 드러내신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1요한 4,7)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다.

왜 이웃에게 한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인가? 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2코린토 6,16) 주님께서는 성령의 현존을 통해 끊임없이 내 안에서 육화하고 계시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는 모두 성스러움이 내재해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다.”(요한 14,17) 우리들이 나누는 사랑은 상대방에 내재해 있는 성스러움에 경의를 표함이요, 상대방에 내재하고 계신 하느님 사랑과의 일치이다. 누군가에게 죄를 짓거나 죄를 짓게 한다면, 그것은 내가 그에게 현존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모욕하고 상처를 드리는 것이다. 왜 내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께서 상처를 받으시는 것일까? 그것은 내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서 상처를 받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심은 바로 하느님의 상처, 곧 예수성심의 상처를 치유해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경외하지 않을 때, 주님께서는 말씀하실 것이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행전 9,4)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재하시고 우리는 성령 안에 존재하기에 우리 모두는 각 객체이면서 하나이다. 바오로 사도는 지체의 비유로 이를 쉽게 설명하고 있다.(1코린토 12,12-27 에페소 1,10) 어느 손가락이 아프든 모두 하느님의 아픔이며 상처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하게 하듯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며 사랑의 일치를 강조하신다. 그것은 ‘자신에게 하듯이’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티아서 3,28)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형제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신 것도 우리 모두 하나이며, 우리의 고통이 당신 자신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거짓이다.(1요한 4,20) 하지만 세상은 하느님과 나, 너와 나, 이렇듯 주관과 객관을 분리함으로 해서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다.

이웃의 아픔과 상처는 곧 그들 안에 내재하고 계신 하느님의 아픔과 상처이다. 허물 있는 형제를 비난하는 것은 하느님의 상처를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하느님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것이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내가 사랑을 실천해도 계속 나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 또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해도 감사해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느님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면 하느님께서 잘했다고 기특해하신다기보다는 고마워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당신의 상처를 어루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수성심과의 일치는 나 자신과의 일치요, 형제와의 일치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곧 나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과 형제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과의 일치이다. 우리가 소외되고 고통받는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은 상처 입으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느님의 상처를 치유해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덕의 실천이기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형제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마태오 25,40.45)이며,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태오 19,19, 22,39, 마르코 12,31)시고, 형제에게 한 대로 네가 심판받을 것(마태오 7,1-2 루카 6,37 19,22)이며,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이기에 형제를 단죄하는 것이 곧 나를 단죄하는 것이요,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곧 나를 용서하는 것이요, 형제에게 해주는 것이 곧 나에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로마서 13,9)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누가 예수님 곁에 남아있었나?

“머리로 그분을 믿지 말고,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라.”

수많은 군중들로부터 환호와 갈채를 받으시고 12제자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따랐던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누가 끝까지 예수님 곁에 남아 그분을 지키고 있었던가?

예수님을 힘을 가지신 분, 우리를 축복해주시고 저주하실 수 있는 분,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는 분, 초능력을 가지신 분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이제 그분은 돌아가시었기에 더 이상의 힘도 없고, 더 이상의 축복도 저주도 없으며, 아무런 능력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 창조주이시며 삼위일체 하느님이라고 믿었던 이들 조차 모두 떠났다. 더 이상 그분은 전지전능하시지도 않고, 창조주 하느님이라고 믿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머리로 예수님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그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묻혀버렸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여전히 그분 곁에 남아있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그분을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만났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누군가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했다.(“We do not believe in something, but we do believe in someone.” Thomas H. Green S.J.) 무엇(something)을 믿고 바라던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누군가(someone)를 찾던 사람들만이 남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베푸신 후에 다시 찾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something)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머리로 그분을 믿지 말고,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라.” 이해는 머리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오래가지 않으며, 이해하지 못하면 받아들이지 못한다. 마음은 오래가며,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받아들인다. 사랑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우리의 믿음은 머리가 아닌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사랑 체험이 필요하다. 종교는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다.

“그분을 족히 사랑할 수는 있지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으로는 그분을 붙들고 차지할 수 있지만 생각으로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무지의 구름》 6장)

“우리는 생각이나 지성을 통해 하느님을 알 수 없으며, 생각으로 하느님과 일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의 갈망을 통해서 입니다.”(《Encounter, Not Performance》 14장)

예수성심은 우리 신앙의 원천이요, 여정이요,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심연(深淵)이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원(始原)인 예수성심의 뜨거운 사랑을 마음으로 하나 가득 체험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예수성심의 약속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원(始原), 예수성심.

자비하신 예수성심께서는 당신의 성심을 공경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셨다.

  1) 그들의 상황에 필요한 은총을 줄 것이다.
  2) 그들의 가정에 평화를 줄 것이다.
  3) 그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들을 위로할 것이다.
  4) 그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특히 임종 때 그들의 안식처가 될 것이다.
  5) 그들이 하는 일에 풍성한 축복을 내릴 것이다.
  6) 죄인들은 나의 성심에서 자비의 샘과 무한한 사랑의 바다를 찾게 될 것이다.
  7) 미온한 영혼은 뜨겁게 타오를 것이다.
  8) 열심한 영혼은 빠르게 완덕을 이룰 것이다.
  9) 성심의 이미지를 두고 공경하는 모든 장소를 축복할 것이다.
10) 영혼 구원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완고한 마음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이다.
11) 이 신심을 전파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내 성심에 새겨놓을 것이다.
12) 9개월 동안 연속해서 매달 첫 금요일에 영성체를 하는 이들에게 임종 때 구원의 은총을 줄 것이다. 그들은 성사의 은총 없이 죽지 않을 것이며, 나의 거룩한 성심은 그들의 임종 때 안식처가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 없이 단순히 예수성심 성화나 성상을 모셨다고 해서 그 장소가 축복되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마르가리타 성녀도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의 신성한 규범들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